-문학관 탐방3, 군산 채만식 문학관을 찾아-

 

금강하구둑을 지나 군산시내로 들어가는 길, 전북 군산시 강변로 449에 자리잡은 ‘채만식 문학관’이 있다. 4월 5일 이 곳을 찾았다.

정문에 들어서니 봄꽃이 피어 있고, 작은 철길이 보인다. 군산항을 통한 일제의 수탈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철길 산책로이다. 건물 왼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금강이 보인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다.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가곡과 어울려 정원은 한결더 문학적 감성에 빠져들게 한다.

 

현관에 들어서니 김선희 문화관광해설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김선희 해설사가 전시 시설을 안내해 주었다. 1층은 채만식 작가의 삶을 고증과 검증을 통해 사실감 있게 재현하여 60여년 전의 작가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들과 정보가 전시되어 있다. 1902년 7월 21일 전북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출생하여 임피보통학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일본제일조도전고등학교 문과, 와세다대학 문과에서 수학, 와세다 대학 재학중 축구 선수로 활약, 동아일보 기자 생활, 장·단편의 발표 작품 등과 1950년 6월 11일 생을 마감하기 까지의 채만식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층을 오르는 계단은 채만식 작가의 연보가 기재 되어 있어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작가에게 다가가는 느낌을 준다. 2층의 영상실에서는 채만식 작가 관련 영상 자료 관람도 할 수 있다.

 

채만식 작가는 장·단편 소설 200여편을 썼으며 동화, 수필 등 여러 장르에 포함하면 생전에 1천여편의 작품을 남긴 다작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김선희 해설사는 “이 곳 ‘채만식 문학관’을 방문한 분들이 선생님을 풍자 문학가로 친일 작가로 생각하지 말고, 알레고리 방법에 의한 항일 작가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고”고 강조한다.

“문학을 한인(閑人)의 소장(消長)거리나 아녀자의 완롱물(玩弄物)에 그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목이 불어져도 주창을 하는 자(채만식, 「自作案內」 <靑色紙> 1935.5)”라고 강변하듯 그의 문학은 역사를 밀고 나가는 힘이 될 수 있는, 한 시대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채만식 작가의 이러한 문학관은 1948년 <백민>에 게재된 단편 「민족의 죄인」에서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가계(家計) 때문에 일제가 주최한 강연회 등에 참석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

채만식 문학관은 하절기(3-10월 : 09:00-18:00), 동절기(11- 2월 : 09:00-17:00) 개관하며 무료 입장이다. 매주 월요일과 매년 1월 1일, 임시휴관일로 지정된 날 외는 연중 개방하고 있다. 올 가을에는 제 16회 채만식 문학상을 시상할 예정이다.

채만식 문학의 이해를 위해 인근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금강 주변, 군산시장, 미두장 등을 살펴보며 채만식 문학속의 공간을 상상하며 실감하는 문학기행이 좋을 것이라고 김선희 해설사는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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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희 문화관광해설사

다음은 김선희 문화관광해설사의 “내 고장 문학관 탐방, 채만식 문학관<전북수필>”이라는 글을 요약하여 소개 한다.

군산시 내흥동 금강변에 고즈넉이 자리한 채만식 문학관은 주차장에서부터 전시관입구 까지 문학관 앞마당을 거쳐서 들어가게 된다. 넓은 마당에는 호남평야에서 걷어 들인 쌀을 실어오던 기찻길(수탈의 철길)과 선생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미두광장, 백릉광장 청류광장 등이 있고 작은 연못에는 하얀 수련 꽃들이 수줍은 듯 반겨준다. 넓은 정원은 조경이 잘 정비되어 있고 봄철엔 철쭉이 여름엔 자귀나무와 장미꽃이 가을이면 국화와 감나무가 계절을 말해주고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포근한 아름다움이 적막감마저 들게 한다.

문학관 울타리인 소나무를 비켜서 가만히 바라보면 저만치 채만식의 대표 소설 ‘탁류’의 배경인 금강이 흐르고 있다. 전시관 앞 광장을 걷다 보면 오래된 가곡들이 흘러나와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 한 느낌마저 들어 채만식의 소설 [탁류]를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채만식(1902~1950) 일본 와세다 대학(부속 제일고등학원)으로 유학 중 집안의 경제적인 몰락으로 인해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 폐학 하게 된다.

대학을 폐한 좌절을 극복하고 작가가 되고자 1923년 처녀작 [과도기]를 탈고하여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선배 이광수를 찾아가 [과도기]를 맡기고 며칠 후면 신문에 대서특필로 이름이 나고 화려한 등극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동아일보로부터 일언반구의 회답이 없자 투고를 모집하던 <조선문단>에 두 번째 작품인 [세길로]로 등단하게 된다.

그 뒤 동아일보, 개벽사,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36년에 모든 걸 접고 전업 작가의 길을 가게 된다.

1936년 12월 개성으로 이주해 넷째 형 춘식의 금광사업을 지원, 낮에는 금광에서 전표 끊어주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작품을 써가며 밤낮으로 일을 하며 살았으나 결국 금광사업이 실패하게 된다. 채만식의 작품 [금의 정열] [철있는 풍경] [백골동원]등은 금을 도굴하는 장면이나 갱내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잘 묘사되어 있어, 작가가 금광에 대한 전문지식과 정보수준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채만식은 다작의 작가이다.
채만식은 [탁류] [태평천하]등 15편의 중.장편 소설과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논 이야기]등 7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소설뿐 아니라 희곡, 평론, 수필, 콩트, 동화 등 거의 모든 문학 장르에 걸친 작품을 써 그가 남긴 작품은 현재 400여 편에 이른다. 그러나 13편의 친일글로 친일 작가에도 올라가 있다.

해방 후 채만식은 자전적 단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변명도 하면서 민족 앞에 죄인임을 인정한다. 친일 행위를 인정하고 반성한 유일한 작가이다.

윤은 그러나 일체로 붓을 멈추고 신문사원의 직업도 버리고 함으로써 대일 협력의 조그마한 귀퉁이에도 참여를 하지 아니하였다. 아니한 것이 분명하였다. 이렇게 대일 협력을 하지 아니한, 그래서 지조가 깨끗한 윤에 대하여 많으나 적으나 대일 협력을 한 것이 있음으로 해서 민족반역자 혹은 친일파의 대열에 들어야 할 민족의 죄인인 나는 그에게 스스로 한 팔이 꺾이지 아니할 수가 없고 따라서 그가 어려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던 것이었었다.

... 한번 살에 묻은 대일 협력의 불결한 진흙은 나의 두 다리에 신겨진 불멸의 고무 장화였다. 씻어도 깎아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죄의 표지’였다.- [민족의 죄인]

채만식은 풍자 작가이다.
1930년대 군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 [탁류], 언제나 부두에는 수척의 기선들이 웅웅 거리며 정박해 있는 군산의 거대한 항구, 하루에도 수천 석의 쌀들이 배에 실리어 일본으로 나가고 있는 그 곳에서 “초봉이는 불쌍한 부모와 동기간을 위하여 제 한 몸 희생시키는 것이라서” 라는 구절처럼 서민들의 빈곤함을 엿볼 수 있고, 결혼 후 초봉이 겪는 시련은, 외세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다 마침내 식민지 국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의 운명과 많이 닮아 있다. 암울하고 혼탁한 시대 배경과, 돈 때문에 딸을 팔고 돈 때문에 양심을 파는 많은 탁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 탁류는 그 시대의 부조리를 잘 풍자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최유찬 교수는(연세대) 탁류를 채만식이 쓴 최초의 항일소설이라고 말한다.

-[탁류]야 말로 알레고리방법의 항일 소설이다. 채만식은 작가가 개발한 항일투쟁의 문학적 방법이 알레고리이고 자전적 기법이고 제3자적 시점을 사용한 풍자였다. 탁류는 식민지 조선이 어떻게 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어떻게 일제로부터 수탈당하는가를, 알레고리를 통해 보여 줌으로써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기원한 항일소설이다.

알레고리 방법의 탁류: 세 남자를 편력하는 초봉이의 기구한 운명- 힘이 없는 조선민족
초봉이의 남편: 고태수 - 고종황제
두 번째 남자: 박제호 - 박제된 호랑이란 뜻의 중국
세 번째 남자: 장형보 - 곤장100대를 맞을 놈 이라는 뜻, 일본제국주의를 상징

소설의 마지막에 장형보를 발길질하여 쓰러뜨리고 급소를 맞아 숨도 못 쉬는 사내를 수십 차례 짓밟은 것도 모자라 맷돌로 내리치며 잔인하게 살해하는 초봉이의 행동을 자세히 묘사한 것은,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조선 민족의 응어리진 한을 푸는 행위를 작가는 초봉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최유찬 [문학의 모험]-2006. 8. 도서출판 역락, -최유찬 [채만식의 항일문학]-2013. 서정시학

채만식이 쓴 [민족의 죄인]에서 제일 눈에 띄는 낱말은 “양서동물”이다.(개구리 도룡농처럼 물고 뭍에서 다 살 수 있는 동물) 일인칭 주인공인 “나”는 겉으로는 친일을 했지만 속으로는 반일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양서 동물이라 함. 즉 친일과 반일을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한 자신의 입장을 말함 - 이선영[창조적 주체와 반어의 미학]

 

고뇌의 장
채만식의 일생은 의.식.주와 병으로 인한 고뇌가 많았다. 굶어 지내는 대가족을 뒤로하고 재상경한 개벽사 시절 밤낮 없는 글쓰기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얼마 안 되는 월급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아 하숙비도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 그런 실정도 모르는 고향에서는 아들의 교육문제까지 들고 나선다. [레디메이드 인생]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집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채만식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49년 내 집 마련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마침 탁류의 인기로 3판이 출판되면서 인세가 들어오게 되고, 은행에서 빚을 얻어 익산시 주현동에 집을 한 채 사게 되는데 들어 살기를 불과 서너달 남짓., 무리한 출자로 인한 정신적 피로는 폐결핵을 악화시킨다.

채만식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이듬해 봄 마동의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한 후 1950년 6월 11일 결국 폐결핵으로 타계하게 된다.

불우했던 가족사와 궁핍한 삶
선생은 말년까지 가장 친한 제자겸 친구인 장영창 시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에게 원고지 20권만 보내주소, 이 편지를 받으면 몸이 좋아져서 글을 쓸려고 하는 줄 알겠지만, 실은 내 생애가 다한 것 같은데 내 평생 소원인 원고지를 죽을 때 나마 머리맡에 놓고 죽고 싶다”라고 하였다하니 작가의 도구라 할 수 있는 원고지조차도 맘껏 살 수 없었던 궁핍했던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채만식의 글 중 사랑에는 행복보다는 고뇌가 많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결혼을 하고 본부인과 함께하지 못하는 삶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되살아나게 하고 문학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웬만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도 거기 있다.

다채로운 어휘와 촌철살인의 기개, 독설적이고 역설적인 문장 운영으로 그를 풍자작가로 우뚝 성장하게 만들었지만, 결코 녹록지 않았던 작가의 삶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채만식 문학관은 군산시가 채만식의 작가 정신을 기리고 지역 문학인들의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2001년에 건립했다. 항구도시답게 정박해 있는 배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문학관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전시관 1층은 작가의 삶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볼 수 있게 잘 전시되어 있고, 선생의 작품세계를 둘러볼 수 있으며 생전의 집필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작가의 연보가 씌여 있는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채만식 전집과 연구서적, 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고 선생의 삶과 작품에 대한 영상을 불 수 있는 영상실이 있다. 작가의 유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진 않지만 채만식의 고뇌와 문학작품에 대한 느낌을 충분히 공감하고 갈수 있는 이곳을,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다녀가길 바란다.

<편집자 주 : 위 “내 고장 문학관 탐방, 채만식 문학관"은 김선희 해설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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