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7월 하순, 손주들과 함께 전남 담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름 방학도 됐고, 여행은 제 애비·에미와 잘 다니지만 이번 여름에는 손주들과 오붓하니 숲 길에서 산책을 하고 싶어서였다. 담양을 찾은 것은 메타세콰이어 길과 죽록원, 소쇄원, 면앙정 그리고 대나무 박물관을 보면서 자연의 멋과 조상들의 운치 있는 생활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손녀는 중2, 손자 하나는 초등6, 그리고 또 하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약간의 나이 터울이 있어 관심도가 다르겠지만, 우선은 할아버지와의 추억 만들기와 사촌 간이지만 사촌 같지 않은 손주들의 사이를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과 이젠 나이가 들어가 앞으로는 손주들과의 여행도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결정을 하고 떠났다.

인천에서 온 2학년 손자가 도착하여 대전의 손주들을 만나 출발하여 호남고속국도를 타고 담양에 도착하니 12시 쯤 됐다. 친지가 소개한 담양 국수거리로 들어섰다. 관방천변 옆으로 국수거리가 있다. 눈에 띄는 첫 번째 집으로 들어서니 육수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다행이 애들도 국수를 좋아하여 맛있게 먹는다. 막내가 만두도 먹고 싶단다. 만두 한 접시가 금방 비워진다. “할아버지도 드세요” 손녀가 말을 하지만, 어느 새 비워진 접시, 한 접시를 더 시켰다. 속담에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부모는 배부르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점심을 먹고 죽록원으로 향했다. 입구 계단을 오르는데 정말 덥다. 그래도 아이들은 신이 나서 계단을 오른다. 큰 손자는 동생의 손을 잡고, 손녀는 조심하며 걸으라고 주의를 준다. 바라만 보아도 흐믓하다. 안내도를 보고 산책로에 들어섰다. 높이 솟은 왕대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와 대나무 정말 크다”, “굵기도 엄청 굵어” 각자 한 마디씩 하며 걸음을 옮긴다. 대나무가 내뿜는 음이온 덕분일까 맑은 공기가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은 대나무 흔들의자에 앉아 서로 밀어주며 즐거워한다. 가끔 써 있는 안내문을 읽어 보며 선비도 되어보고, 철학자도 되어본다. 사랑이 변치 않는 길에서는 삼남매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어 달랜다. 그렇게 대나무 숲길에서 형제간의 우의를 다졌다.

다음엔 대나무 박물관으로 갔다. 아이들이 탄성을 올린다. “대나무로 이렇게 많은 것을 만들다니......”. 옛 활로부터, 각종 그릇, 생활용구, 장기·바둑판에 의자, 그리고 현대의 대나무 자전거 까지 큰손자가 동생에게 설명을 한다. ‘옛날에는 외적이 쳐들어오면 농민들이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마을과 나라를 지키며 싸웠다’고. 손녀가 정수기에서 물을 떠다 준다. 동생들에게도 물을 주는 그 모습을 보며 ‘이젠 다 컸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해가 서쪽하늘로 기울어 질 무렵 메타세콰이어 길로 향했다. 높이 솟은 나무사이로 쭉 뻗은 길, 사진이나 그림에서 보던 정통 가로수길 정대칭 구도 그 모습이다. 그 길 앞에서 아이들의 함성이 높아진다. “와!”. 우리는 함께 서서 저 멀리 길 끝을 보고 마음속에 다짐도 했다. 앞으로 희망을 갖고 밝고 건강하게,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전진해 나가자고.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내 욕심은 아닌지 되새겨 보며 멋진 풍경을 깊이 담아가자고 했다. 지난 해, 캐나다를 다녀 온 막내가 질문을 한다. “저런 나무 캐나다에서 많이 보았는데 같은 종류예요?” “응, 같은 종류야, 여기 있는 나무는 원래 우리나라에서 옛 부터 자란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와 기른 거지. 그런데 잘 자라서 멋진 풍경이 되어 이젠 관광지가 됐단다. 특히 이 길 말고도 담양에는 여러곳에 메타세콰이어 길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몇 군데 메타세콰이어 길이 있는데,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길이 유명하지” 시원한 그늘과 불어오는 바람결에 밀려 면앙정으로 향했다.

경사가 급한 산길을 3-4분 오르니 작은 정자가 나타난다. 정자하나 뿐인 모습에 아이들은 좀 실망한 눈치다. 단촐한 정자 뜰마루에 앉아 넓은 논과 풍경을 잠시 보도록 하고는 “면앙정가”의 한 구절 “너럭 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얹어 놓았으니/ 마치 구름을 탄 푸른 학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 하구나”를 소개 했다. 손녀가 “앞들과 주변경치를 보니 면앙정가를 지으신 송순이라는 분의 자연속의 삶을 조금은 이해 할 듯하다"고 한다. ’면앙정가‘는 수능에도 출제되는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이야기를 해주면서 앞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가 혹, 면앙정가를 배우게 되면 오늘 본 이 경치와 정자 모습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했다. 나 자신도 다시 한 번 송순의 ’자연에 묻혀 살며 자신을 '신선'이라고 표현하고,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자연 친화적 인생의 가치를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

숙소로 기는 길에 식당에 들려 저녁을 먹었다. 동생들에게 생선 가시를 발라주는 손녀가 대견스럽다. 반찬이 맛있다고 동생에게 건네는 큰 녀석이 기특하다. ‘형아도 많이 먹어’하는 작은 녀석이 귀엽다. “와, 음식이 ‘입에 살살 녹아’라는 말이 실감을 못했는데, 이 생선구이는 정말 녹는다”라는 큰 녀석의 말에 모두의 젓가락이 이름 모를 생선구이로 향했다. “형아, 정말 녹는다”, “와, 할아버지 정말 녹는 것 같아요”라는 손녀의 말에 나도 한 첨 떼어 입에 넣었다. 정말 녹는다. 맛있는 것을 서로 챙겨 주는 모습에 즐거운 저녁 식사가 됐다.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감사하며 여행에서 느낀 점과 소감을 나누고 내일 위해 잠을 청했다.

이튿날 소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물과 정자 3개가 전부인 소쇄원이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 일부가 되도록 지은 정자와 누각 배치의 구도와 옛 선비의 자연 친화적인 삶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제월당 마루에 앉아 앞 경치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았다. 큰 손자가 “할아버지 이런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다. 무언가 마음에 와 닿는 모양이다. 소쇄원((瀟灑園)의 소(瀟)는 물 맑다, 쇄(灑)는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며,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 학자를 소개하며 이 정자와 누각에서 당대 유명한 선비들과 학문을 이야기 했다고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진지하게 듣는 모습이 기특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조손동락(祖孫同樂)의 시간 속에서 평소에 이야기 하지 못한 것을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 됐다. 작은 손자가 “할아버지, 겨울 방학에도 이런 여행해요”라고 한다. 우리의 후손이기에 우리 것에 대한 통하는 느낌이 들었나 보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한 솔로몬의 잠언을 생각하며 나이 들어 손주들을 돌보는 보육기(保育機)가 아닌 동락(同樂)하는 조손(祖孫)간의 시간을 더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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