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식 날 학교 선생님에게서 빠짐없이 받는 것이 있었다. 바로 ‘통지표’. 이 통지표가 웃고 울게 만든다. 성적란 수, 우에 빨간 인주의 0표가 찍혀 있으면 그나마 안심이 되는데, 양, 가에 찍혀 있으면 걱정이 태산 같았다. 집에 가서 도장 받을 걱정에.

그런데 아버님이 성적보다 옆에 있는 행동발달상황에 관심을 갖고 계셨음을 5, 6학년 때쯤 알았다. 그 쪽은 자율성, 검약성, 책임성, 정의감 등 쉽게 이해되지 않는 칸에 가, 나, 다 중 하나에 붉은 0표가 찍힌다. 아버님이 관심을 가지셨던 것은 ‘책임성’이었다. 책임성 가 또는, 나에 0표가 찍혀 있으면 보호자 확인란에 도장을 꾹 눌러 주셨다. 도장을 받으면 방학 한 달은 신이 나서 놀 수 있었다. 개학 날 통지표 낼 때 보호자 칸에 “부모님 도장을 꼭 받아와야 한다”는 강력한 선생님의 지시를 책임 완수했기 때문이다. 도장이 찍혀 있지 않으면 선생님께 퍽이나 야단을 맡곤 했었다.

책임-責任, 責은 규명, 꾸짖음, 해야 할 임무, 요구, 밝힘 등의 뜻이 있다. 任은 맡김, 맡은 일 등의 뜻이 담겨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책임-①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②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 ③위법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법률적 불이익이나 제재를 가하는 일. 민사 책임과 형사 책임이 있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6월이 간다.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하여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책임을 다한 사람을 추모하고 나라의 안전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다짐하는 행사가 열리고, 또 영령들에게 감사하는 달이다. 추모를 받는 영령들은 책임을 다한 분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분의 행동이 보여 준 군인으로서의 나라 지킴 책임감이 아닐까? 작은 권모술수에 놀아나지 않고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 책임감. 한국전쟁 당시 술병에 석유불을 붙여 남하하는 적군의 탱크에 뛰어든 분들도 결국 나라를 지키겠다는 책임감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가깝게는 세월호 침몰당시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히며 자신의 조끼를 벗어 준 단원고의 네 분 선생님들, 20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의 아시아나 항공기 충돌 사고 시 다섯 승무원들의 승객 대피 및 구조, 이분들의 공통점은 자신들보다는 책임진 사람들에 대한 할 의무를 다한 책임 완수의 ‘살신성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그런 모습에 분노하면서도 살신성인의 영웅들이 있기에 감사하면서 그 분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며 감사한다. 그래서 책임감은 소중한 덕목이다. 2015년 제정된 인성교육진흥법에도 책임은 핵심 가치 덕목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데 가끔은 이 책임이라는 말이 위 국어사전의 풀이처럼 되지 않는 듯하여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나라의 일을 맡은 분들이 하는 말 중에 “책임지고 물러나라”, “책임지고 물러난다‘라는 말이다. 자리만 물러나면 책임이 다 된 것일까. 책임은 의무이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 책임에는 위 풀이 ③처럼 민사와 형사 책임이 있다.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가치 없이 사용하고, 우월적 권위를 이용해 많은 못된 짓을 저지르고도 자리만 물러나면 되니 이 또한 ”책임“을 졌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된다.

責이 규명과 꾸짖음의 뜻이 담겨 있듯 밝히고 질책을 받고 그에 대한 부담을 져야한다. 엄청난 예산을 투입한 국가적 사업의 미미한 결과, 때론 예산 탕진, 예측이 잘못된 사업의 피해, 퍼주기 식 예산 배부 등의 결과에 책임을 지는 건 결국, 의무 없는 국민들의 몫이 된 것이 어디 한 두 번 이었을까? 하물며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변명이 가득하다. 시인 윤동주는 지식인으로서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평생 갖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서시’를 통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라고 고백했다. 자기 책임도 아닌데...... .

지난 현충일, 조기를 게양하며 나 스스로를 되짚어 반성해 보았다. ‘나도 과연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나?‘ 편집국의 원고 기일에 맞추어 ’마음과 행동에 동떨어진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새 정부가 들어서고 조각을 위한 장관 후보자들의 청문회가 한창이다. 여,야가 바뀌었는데도 내용은 예전과 비슷하다. 임명될 후보나 청문을 하는 의원들이나 모두가 똑 같이 나라를 위한 책임감을 갖고 바르게, 빠르게 처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랜 가뭄으로, 폭염으로, AI로, 살림살이 걱정으로 시름 깊은 우리네 삶이 고대하는 빗줄기처럼 시원하게 풀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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